전국의 발효 현장을 찾아 생산자를 직접 만나고, 발효가 만들어지는 공간과 철학을 기록하는 현장 연재입니다. 책과 강의에서는 만날 수 없는 발효의 이야기를, 사람과 현장을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6월 3일, 경북 성주에 있는 백말순등겨장을 찾았습니다.
백말순등겨장은 전통 방식의 자연발효를 고수하면서도 HACCP 제조시설을 갖추고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며 지속가능한 전통발효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는 참발효어워즈 대상 수상 생산자입니다.
발효학교 3기 김영훈 씀
등겨장, 들어보셨나요?
등겨장은 보리를 도정하고 남은 고운 속껍질 자루인 보리등겨(보릿겨)로 만드는 경북 성주의 전통 발효장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보리등겨를 섞어 만드는 장이 아닙니다.
등겨장은 만드는 과정부터 매우 독특합니다.
먼저 보리등겨를 반죽해 도넛 모양으로 빚습니다. 이것을 찐 뒤 다시 구워 메주처럼 자연 발효시키고, 이후 삶은 콩과 메줏가루, 고춧가루, 조청 등 여러 재료를 넣어 다시 숙성합니다.
만드는 과정도 길고 손도 많이 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의 시간과 발효를 거친 덕분에 일반 된장과는 전혀 다른 고소하고 달큰하며 깊은 풍미를 만들어 냅니다. 등겨장은 보통 찌개를 끓이는 장보다 그대로 먹는 장에 가깝습니다. 따뜻한 밥에 비벼 먹거나 채소와 함께 쌈장처럼 먹으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구수하고 깊은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제조 과정이 까다롭고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쉽게 만날 수 없는 장이 되었지만, 성주 등겨장은 최근 국제슬로푸드협회의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재되며 보존해야 할 전통 발효문화로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성주에서는 집집마다 등겨장을 담갔고, 며느리라면 자연스럽게 익혀야 하는 생활의 기술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의 말처럼 할머니는 시집가서 장맛을 인정받았고, 그렇게 시작된 장 담그기는 평생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 장맛은 지금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어져 2대째 가업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2대째 등겨장을 만들고 있는 최준석 대표
깨끗한 전통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전통장 업계에서는 드물게 최준석 대표가 HACCP 제조시설을 갖추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깨끗한 곳에서 전통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설이 좋은 장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종균을 넣지 않고 자연발효만을 선택했고, 메주가 뜨지 않아 3년 동안 수없이 실패했습니다. 버려야 했던 메주가 너무 많아 포크레인으로 구덩이를 파 묻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다림 끝에 만난 자연균
전환점은 일본 전통장 생산지를 방문했을 때 찾아왔습니다.
오래된 발효실에는 벽과 바닥에 오랜 세월 살아온 미생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닦아내지 않았습니다.
생산자들은 발효가 용기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하나의 발효 생태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 발효실에도 언젠가는 자연균이 자리 잡겠지.'
그 믿음으로 기다린 끝에 3년이 지나자 메주가 안정적으로 발효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과 미래를 함께 고민하다
현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수강생들이 발효를 조금 더 빨리 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빨리할 필요도 없고, 할 줄도 모릅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도를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HACCP 인증을 받은 제조시설을 갖추고, 생산 효율을 높이는 장비를 직접 제작하며, 재래메주와 알메주를 조합한 새로운 메주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 발효를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통을 어떻게 더 오래 이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등겨장의 맛
등겨장은 감칠맛 하나만으로 설명되는 장이 아닙니다.
보통 장류의 감칠맛은 콩 단백질이 분해되며 만들어지는 아미노산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등겨장은 보리등겨를 중심으로 발효되기 때문에 조금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퍼지는 은은한 단맛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산뜻한 향
은은하게 감도는 매운 향
여러 향이 겹쳐지는 복합적인 풍미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구수하고 부드러운 감칠맛
감칠맛 하나가 강하게 앞서는 장이 아니라, 여러 맛과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깊이를 만들어내는 발효. 이것이 등겨장만의 가장 독창적인 매력입니다.